미국의 국가 ‘채무불이행’ 위기가 완전 소멸되었다. 여야 지도부 합의안이 하원의 5월 31일 극적인 통과에 이어 상원이 6월 1일 자정(한국시간 2일 오후1시)을 1시간 반 앞두고 유례없이 신속하게 승인한 것이다. 다만 2025년 1월까지 20개월만 유효하다는 한계가 있다.

돈이 없어 빚이나 빚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하는 것이 채무불이행, 디폴트지만 미국의 이번 위기는 꼭 경제적 사정에서 비롯됐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경제보다는 미국의 정치 문제라는 측면이 강했고 그래서 정치적으로 해결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세계 일등부자 나라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분기마다 발표하는 각국 국내총생산(GDP) 추계치에서 올 4월 미국의 GDP는 26조8500억 달러(약 3경5000조원)로 전 세계 총액 105조5600억 달러의 25%를 차지했다. 미국 정부는 이렇게 국민들이 새롭게 가치를 창출한 부에서 세금을 거둬 국가를 운영했으나 거의 매해 빚을 져왔다. 예산 총수입보다 많은 돈을 지출하는 것이 버릇이 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사람은 몰라도 정부는 부자일수록 빚을 펑펑 낸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2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이 백악관에서 연방정부 채무상한액 상향 협상을 벌이고 있던 당시의 모습. [사진 = AP/연합뉴스]
지난 22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이 백악관에서 연방정부 채무상한액 상향 협상을 벌이고 있던 당시의 모습. [사진 = AP/연합뉴스]

전 세계의 부채는 가계, 기업, 정부 다 통틀어 300조 달러에 달하고 이 중 정부 부채가 100조 달러 정도며 미국 정부 빚이 35조 달러(약 4경5700조원)로 GDP 비중을 훨씬 웃돈다. 여기서 정부 부채는 비확정 연금충당 미래부채는 물론 비영리 공공기관과 비금융 공기업의 채무는 포함하지 않은 것으로 중앙정부와 지방 각 정부 채무만을 합한 일반정부 부채 개념이다.

미국이 정부 빚을 많이 지고 있는 것은 세금을 다른 나라보다 덜 거둬서 그렇다는 분석이 있다. 연방정부와 주정부 및 수많은 시당국 등 미국 일반정부가 예산 총수입으로 거두는 돈은 현재 연 8조2000억 달러 정도로 GDP의 31%에 해당된다. 총수입 가운데 조세 수입만 따지면 27%로 선진국 그룹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8개국 평균치 34%에 한참 못 미치고 순위로는 32위다. 세금을 적게 거두고 정부지출을 적게 하면 정부나 나랏빚이 많지 않을 터이나 미국은 그러지를 못했다.

미국 연방정부는 최근 1년 6조2000억 달러의 예산지출을 했으나 세금 및 기금의 총수입으로 4조7000억 달러를 거두는 데 그쳤다. 1조5000억 달러(약 1950조원)가 재정적자로 고스란히 채무로 쌓인 것이다. 주정부와 시정부의 연 재정적자는 2000억 달러에 머물렀다. 그런 만큼 연 재정적자의 누적치인 일반정부 부채 35조 달러는 연방정부가 거의 다 내왔다. 31조4000억 달러(약 4경1000조원)가 연방정부 누적 채무로 미국 일반정부 부채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이 연방정부 누적 채무를 미국서 ‘국가채무’로 불러 우리나라처럼 중앙정부 채무와 지방정부 순채무를 더해서 국가채무로 부르는 것과는 약간 다르다. 연방정부의 누적 국가채무 31조4000억 달러가 이번 미국 국가 디폴트 위기사태의 주범이다. ‘디폴트’라고 하니 외국 채권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어서 이 빚을 갚으라고 아우성인데 미국 금고는 텅텅 비어 일등 부자나라가 채무불이행의 신용불량자가 되는 상황인 것인가 하고 상상할 수 있지만 미국의 디폴트 소동은 이와는 영 딴판이다.

금고 상태가 아닌 ‘국가채무 상한’이라는 미국만의 정치 제도에서 채무불이행 소동이 터졌다. 31조4000억 달러 중 외국 정부나 개인이 채권자인 빚은 7조5000억 달러(약 9800조원) 정도며 외국 채권자들은 세계서 가장 안전한 빚인 미국 국채의 만기와 정기 이자지불을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국가채무가 31조4000억 달러 선에 딱 닿는 순간 미 연방정부는 당장 필요한 1달러도 빌릴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미 헌법에 정부가 돈을 빌릴 때는 의회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는 구절이 있고 이 구절에서 1917년 연방정부는 의회가 정한 상한 내에서 국가채무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법이 생겼다. 상한이 다 차면 다시 의회가 새 상한을 허락할 때까지 빚을 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미 연방정부 예산안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총수입과 총지출이 같이 명시된 상태서 확정되어 그 차액인 재정적자 혹은 흑자 규모가 처음부터 분명하다. 그런데 미국 연방은 회계연도 중간에 국가채무 총액이 평상의 지출 속도 속에 상한에 도달하면 의회의 채무상한 ‘상향’을 액수와 함께 정식으로 허락받아야 한다. 바로 얼마 전에 의회가 예산안에다 재정적자를 구체적으로 인정했건만 야당은 시미치를 뚝 떼고 채무상한의 당위성을 논하기 시작한다. 이번 채무상한 디폴트 위기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31조4000억 달러 상한은 2021년 12월 의회가 2조5000억 달러를 추가해서 새로 허락한 것이며 의회는 2022년 12월 말 총 5조9000억 달러, 예상 재정적자 1조5000억 달러(약 1950조원)의 새 예산을 통과시켰다. 1조 달러가 넘는 새 적자가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2023년 초반에 상한선 도달이 확실시되었다. 이때 4년 만에 하원을 장악한 야당 공화당은 때는 이때다 싶게 연방정부의 채무상한 상향 고비를 정치적 호기로 이용하고자 했다. 정부의 디폴트 위기에 불을 지펴 민주당과 조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정부지출 대폭 삭감 약속을 우려낼 속셈인 것이다.

채무불이행은 빚이나 빚 이자를 제때 못 갚는 것이지만 예산에 의거해 정부에게 정기적 지불을 요구하는 노령 국민연금, 현역군인 월급 등 수많은 청구서에 돈을 주지 못하는 재정의무 불이행도 광의의 디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예산의 5% 내인 국가채무 관련 지불을 수행하지 못해서 미국이 디폴트 국가가 되는 순간 파장이 더 커 전 세계로 퍼진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방정부 국가채무가 회계상 상한에 도달한 올 1월부터 상한 상향 협상하고 정부지출하고는 연계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만큼 공화당의 지출삭감에 대한 맹렬한 의지를 의식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을 구별하는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재정적자를 감수해서라도 세금을 많이 거둬 사회 평등과 국민복리에 많이 쓰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며 장기적으로 경제도 발전돼 총수입이 늘어난다고 보는 것이 ‘큰정부’주의의 민주당이다. 공화당은 국방비 외에는 세금을 덜 걷고 민간 일에 덜 개입하는 것이 좋은 정부라고 본다. 양당이 티격 타격하는 새 국가채무가 31조4000억 달러로 GDP의 125% 수준까지 차올랐다. 이 채무 중 정부 부서 간 거래를 빼고 꼭 갚아야 하는 진성 채무는 GDP 93%인 24조5000억 달러다.

미 연방정부가 세금은 덜 걷고 대책 없이 정부지출에 관대했다고 볼 수는 없다. 코로나19 전 2017년까지 근 40년 동안 연방정부의 연 재정적자는 평균 GDP 3.6% 수준이었다. 한국은 유럽연합 본을 떠서 재정적자가 GDP 3%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재정준칙 명문화를 시도하고 있다. 미 공화당은 적자가 하나도 없는 균형예산은 아니지만 적자 수준을 반으로 줄이는 것을 대강령으로 삼고 유권자 지지를 호소해왔다.

여야의 신뢰를 공히 받고 있는 미 연방의회의 의회예산국(CBO)은 올 2월 정기적인 예산 및 적자 추계에서 현 법제와 경제 추이로 보아 2023년부터 10년 간 연방정부 지출이 80조 달러로 재정적자가 21조 달러(약 2경7300조원) 가까이 새로 발생해 국가채무가 31조 달러에서 52조 달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달 뒤 바이든 대통령은 내년도 연방예산 제안서를 의회에 제출하면서 “부자와 대기업에 10년 동안 5조 달러(약 6500조원)를 증세해 2조 달러를 지출증액에 쓰고 3조 달러를 국가채무 감축에 쓰자”는 안을 냈다.

증세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공화당은 쳐다보지도 않고 되려 4월 말 ‘올해 예산부터 지출을 대폭 삭감해 10년 동안 국가채무를 4조8000억 달러(약 6200조원) 줄이는’ 법안을 222-213으로 우위인 하원에서 통과시켰다. 상원이 51-49로 집권 민주당이 우세하므로 이 법안이 성안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이런 ‘일방적 분출’ 과정을 거쳐 5월 6일부터 바이든 대통령과 공화당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 간의 국가채무 상한상향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었고 28일 채무상한 적용 20개월 유예와 2년간 연방예산 동결을 맞바꾸는 타협이 이뤄졌다.

예산은 주요 부분이 한 해만 바꿔져도 그 영향은 10년 간다. 의회 CBO는 양당 지도부 타협안으로 10년 동안 1조5000억 달러(약 1950조원)의 재정적자가 감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체제로 가면 발생이 뻔한 적자가 이만큼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공화당 강경파가 주도해 하원 통과시킨 법안의 감축 목표치 4조8000억 달러(약 6200조원)의 31% 수준이다.

5월 31일 합의안은 하원 표결에서 민주당 165명과 공화당 149명 등 314명이 찬성하고 117명이 반대해 통과되었다. 찬성은 민주당이 더 많았고 반대는 공화당이 71명으로 더 많았다.

이로부터 26시간 뒤 절차 따지기로 유명한 연방 상원이 불같이 최종표결까지 내달아 63명 찬성 36명 반대로 통과시켰다. 바이든 대통령이 즉각 서명을 천명했다.

연방 재무부는 스무날 전 6월 5일 0시가 되면 그간 5개월 동안 해온 회계 변통이 완전 불가능해 디폴트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가채무 총액이 31조4000억 달러(약 4경1000조원) 상한선에서 1달러라도 아래에 있게 하는 회계 재주를 더 이상 부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시점으로부터 만 사흘 전에 위기가 소멸되었다.

김재영 전문위원(전 서울신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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